한 송이만 검게 변한 해바라기다.
마치 얼굴을 이쪽으로 향하고 망연히 서 있는 사람의 모습 같다.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있는 걸까 하고.
레녹스 : …비앙카….
레녹스가 희미하게 숨을 죽인다.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해바라기가 흔들렸다. 파우스트가 검은 가루의 선을 넘는다.
네로 : 파우스트!
네로가 제지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파우스트는 검은 해바라기를 품에 안았다.
오랜 시간 속에 두고 가 버린 동지를 힘껏 끌어안는 것처럼.
파우스트 : 《satillquinart mullcreed》
희미한 빛에 싸여 검은 해바라기는 먼지가 되어 갔다.
그리고는 선명한 노란 해바라기와 끝없이 눈부신 푸른 하늘이 남았다.
비앙카의 저주는 정화되어, 아름다운 해바라기밭에는 평화가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고마움을 표하며 우리에게 해바라기 씨앗과 해바라기로 물들인 머플러를 주었다.
다들 짧은 인사를 나누고 란즈베르크령의 해바라기밭을 떠난다.
어딘가 쓸쓸한 끝맺음이었다.
마법소 탑을 나와 마법소로 돌아가려는 우리를 파우스트가 멈춰 세웠다.
파우스트 : 기다려.
아키라 : …왜 그래요?
파우스트 : 아주 조금이지만 저주에 닿았어. 저주를 거주 공간에 들여놓지 않도록 정화 의식을 가르쳐 주지.
히스클리프 : 정화 의식….
파우스트 : 그래. 각자 방에서 행하도록. 현자, 너도.
아키라 : 알겠어요….
긴장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네로가 웃음을 흘리며 웅크리고 앉았다.
네로 : 파우스트 선생님, 첫 수업인가.
파우스트 : 버릇없는 자세로 앉지 마라.
시노 : 강력한 공격 마법은?
파우스트 : 그건 나중에. 그 전에 시노에게는 인내를 가르쳐 주지.
루틸 : 정화 의식…. 저희도 같이 들어도 될까요?
파우스트 : 나는 상관없다만….
파우스트가 시선을 보내 남쪽 국가의 선생님인 피가로에게 확인을 받는다. 피가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가로 : 좋은 기회야. 루틸과 미틸도 배우도록 해.
미틸 : 좋아요!
레녹스 : 파우스트 님. 은제 그릇이 필요할까요?
파우스트 : 아니, 미리 안뜰에 준비해 놨어. 각자 그걸로 물을 떠 줘. 사실은 폭풍우를 받는 게 좋지만….
피가로 : 오즈에게 부탁하자.
우리는 안뜰에 모여 은색 그릇을 안은 채 먹구름이 몰려오기를 기다렸다.
똑똑 떨어지기 시작한 비가 쏴 하고 힘차게 쏟아져 내린다.
번개가 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세찬 비에 뺨을 씻어 내며 우리는 빗물이 차기를 기다렸다.
그것은 이상한 시간이었다. 조용하고 과묵하고 신성하고 쓸쓸하고, 그런데 어딘지 일체감이 있다.
같은 비를 맞으며 같은 의식을 치른다.
파우스트 : …자기 방으로 돌아가면 창문과 문을 닫고 초에 불을 붙인 뒤 은그릇에다 폭풍의 빗물을 끓이도록 해.
파우스트 : 몸에 걸치고 있던 것은 전부 벗고 그릇이 끓어오르면 증기를 쐐라.
파우스트 : 우선 혀에. 다음은 눈꺼풀에. 그리고 손가락. 옷은 계속 입지 않은 채, 얼굴에서 다리로 온몸에 증기를 쐬는 거야.
파우스트 : 빗물이 한 방울도 남지 않을 때까지 말 한마디 꺼내서는 안 된다.
파우스트 : 끝나면 창문과 문을 열어젖히고 증기를 밖으로 내보낸 뒤 바람을 통하게 해.
파우스트 : 이거면 된다. 다 외웠나?
아키라 : …알겠어요. 저기…. 실수하면 무서운 일이 일어나나요…?
조심조심 물어보는 나에게 파우스트는 빗속에서 웃어 보였다.
파우스트 : 나는 저주술사야. 그때는 내가 구해주지.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이야기한 대로 양초용 작은 화로에 은그릇을 놓고 불을 붙였다.
그릇 속 빗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옷을 벗고 알몸이 된다.
욕실이 아닌 곳에서 벌거벗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키라 : (다들 같은 행동을 자기 방에서 하고 있는 건가…)
그것은 기묘한 일체감이었다.
닫힌 방에 나 혼자뿐. 그런데 함께 옷을 벗고 임무를 마치고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하얀 증기가 피어오르기를 기다린 뒤 혀를 내밀었다.
눈꺼풀에 증기를 쐰 순간, 선명한 해바라기밭이 뇌리에 되살아난다. 거기서 한 여자가 웃고 있었다.
울고 싶어질 만큼 희망에 찬 천진무구하고 밝은 얼굴로.
??? : 파우스트 님! 레녹스! 다음은 어디로 진군하나요?
??? : 저, 끝까지 따라갈게요. 모두와 함께!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간다.
바람에 나부끼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해바라기로 물들인 머플러처럼 다정한 연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아키라 : …그립네….
연노란색 머플러를 바라보면서 나는 무심코 미소를 머금었다.
선물로 받았을 터인데 유품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좀처럼 입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몸에 걸쳐 볼까. 거울 앞에서 대보고 있자 노크 소리가 울린다.
파우스트 : 나야.
파우스트였다. 보기 힘든 손님이 찾아와 놀라며 서둘러 문을 연다.
아키라 : 네. 무슨 일인가요?
파우스트 : 네로가…. ….
말을 꺼내려던 파우스트가 내가 목에 감은 머플러를 보고 말을 멈춘다.
미소만 지을 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목덜미로 손을 뻗어 머플러 모양을 잡아 준다.
파우스트 : 네로가 차에 곁들일 과자를 구웠다더군. 너도 괜찮다면 함께 어때.
아키라 : 와아, 좋아요! 파우스트가 부르러 와 주다니 별일이네요.
파우스트 : 가위바위보에서 졌어. 네가 시노와 히스에게 가르쳐 준 거지.
아키라 : 가위바위보, 기억해 줬군요. 저하고도 해요. 참참참도 가르쳐 드릴게요.
파우스트 : 그건 또 뭐지.
파우스트와 나란히 웃으며 마법소 식당으로 걸음을 옮긴다.
목에 감은 부드러운 연노란색 머플러는 무척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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